
엄혹하고 황량한 북녘의 땅 훗카이도
차가운 유빙 속에서 지켜낸 삶의 애환

훗카이도에 가기 전 비행기에서 읽을 만한 책이 무엇일까 고민했다. 집에는 아무리 둘러봐도 없다.
적당한 책을 찾으러 도서관에 갔다.
일본 소설이 좋겠다는 생각은 변함이 없었다.
일본의 문화를 관찰한 작가가 아닌,
문화를 체험한 작가의 자연스러운 묘사를 원했다.
꽤 오래 둘러보아도 괜찮은 소설이 없다.
마지막으로 서재를 보는데, 사람 손이 타지 않은 소설책 하나를 발견했다.
우리는 모두 무언가에 얽매이고,
무언가에 짓눌린 채 살아간다
소설 <빙평선> 중
나를 사로 잡은 문장.
책을 고를 때 3가지 이유가 있다.
1번째 소개
2번째 충동
3번째 정보
내용을 훑어보니 충동 쪽에 가깝다. 누군가 추천하지도 않아 이 책이 좋을지 나쁠지 모르겠지만, 훗카이도에 갈 때 읽기 좋은 책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우리는 함께 비행기에 올랐다.
<결론>
완독 후 내 충동은 다시 이어졌다. 이 작가의 책을 또 읽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찾아보니 나오키상 수상자인 '사쿠라기 시노'의 데뷔작이라고 한다. 신기하게도 나오키상은 언제나 내 입맛에 맞는다.
책을 다 읽었음에도, 몇 번이고 책을 훑어 보았다. '대체 이 작가..뭐지?' 호기심과 함께 내가 놓친 부분이 무엇일까 하고. 남김 없이 다 읽고 싶었다.

훗카이도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도 읽고, 여독을 풀기 전에도 이 책을 놓지 않았다. 겨울 훗카이도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읽기에 제격인 책이었다.

너무 지루하지도 않고, 또 너무 심오하지도 않으며, 훗카이도의 겨울의 감상을 느낄 수 있는 그런 책이니 말이다.
6편의 소설은 모두 훌륭했으나, 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편만 추려보고 싶다.
여름의 능선
출처 입력
<줄거리>
주인공 교코는 도쿄에서 일을 하다, 시골로 내려와 낙농업을 하는 가즈야를 만나 결혼 하고 초등학생 딸 마유가 있었다. 함께 사는 시어머니 다키는 늘 교코를 못마땅해 했다.
둘이 그럭저럭 괜찮게 지내는데도
이렇게 오래 안 들어서는 걸 보면
너한테 뭔가 문제가 있는 거야.
페이지 108
가즈야는 점점 집안일과 낙농에도 소홀해지며 교코는 집안의 살림과 육아를 책임져야 했다. 심지어 시어머니는 아들이 없는 걸 모두 교코 탓으로 돌리는 것도 모자라 아들의 흠을 감쌌다. 그러던 중 마유가 다니는 학교에 새로운 선생님 아오야마가 부임을 해왔다는 소식을 듣는다.
동네의 부녀자들은 아오야마에게 눈에 띄기 위해 노력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교코는 그런 소문에 미동도 하지 않았다. 자신이 책임져야 할 일이 많아, 자신이 여자인지 되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가즈야는 점점 외박하는 일이 잦아졌다. 교코는 남편이 밖에서 무슨 일을 하고 다니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알았어. 잘 놀고 와."
"다시 말해봐. 잘 놀고 오라고
다시 한번 말해봐!"
거짓으로라도 겁에 질린 척했으면
좋았을지도 모른다.
출처 입력
다툼 이후, 가즈야의 빚쟁이가 찾아왔다. 빚쟁이는 가즈야가 나이 많은 여자와 몸을 섞고, 그 돈을 받으러 왔다고 했다. 시어머니는 이 모든 게 교코 탓이라고 했다.
그 후로도 가즈야는 밤에 나갔다. 그럴 때면 시어머니 다키는 아침까지 잠을 푹 잘 수 있다며 불면증 약을 교코에게 먹으라고 권했다.
쌓이는 억울함과 답답함을 못 견딘 교코는 그날밤 무작정 아오야마가 있는 학교로 향했다. 아오야마를 만나기 전 셔츠의 단추 하나를 더 풀었다.
<감상평>
이 단편을 읽는 80%는 교코는 어떤 식으로 화를 낼까, 어떻게 복수를 할까 궁금해 하는 시간이었다. 조마조마하며 교코의 화가 조금씩 누적되는 것을 빠르게 읽어 나갔다. 시어머니와 가즈야가 그녀의 화를 키우는 모습을 볼 때마다 그 열기가 나에게도 전이되었다.
시어머니는 가족을 아끼는 것이 아니라, '아들'만을 아끼는 사람이다. 자신이 이룬 것 중에 잘한 일은 '아들'을 낳은 것뿐이었다. 그런 사람에게 며느리란, 그저 아들을 보필해 줄 사람일 뿐이다.
교코는 시어머니의 말을 따르는 것 같지만, 묘하게 저항하고 반항한다. 절대 시어머니에게 자존심을 굽히고 들어가는 일이 없다. 그런 그녀를 보며 시어머니는 교코의 자존심을 무너뜨리려 전력을 다했을 것 같다.
나이가 쉬이나 되는 여편네하고
오입질을 했다잖아!
한 번에 1만 엔이라니,
대체 뭔 짓거리인지 모르겠네.
사람을 봉으로 알고.
페이지 134
가즈야의 오입질, 그것으로 끝났다면 교코는 그냥 참았을 것이다. 자신을 귀찮게 하지 않는 것으로 오히려 좋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돈을 내지 않아 아내인 교코가 지불하게 만들고, 그 일이 일어난 탓을 교코에게 돌리는 시어머니의 뻔뻔함을 보며 깊은 환멸을 느꼈다.
교코는 아오야마와 함께 잠을 자고, 자신의 성욕과 남편에 대한 복수심을 해소할 수 있었을 텐데, 왜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 의문이 들었다.
아무래도 이 청년의 눈에 비친 자신은
아직 여자 꼴을 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것을 깨닫고 나자 아오야마의 눅눅한
시선은 이제 꼴사나운 것으로 바뀌었다.
출처 입력
아오야마가 교코에게 느끼는 감정 또한 남편 가즈야의 욕정과 다를 것 없다는 걸 교코는 영리하게 알아차렸다. 내 환상 속에 있던 그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한 순간, 내가 느낀 기대는 거추장스럽고, 귀찮은 마음만 남는다.
교코는 홀린듯 마을을 떠나는 선박의 사간표를 들고 집으로 갔다. 그 순간 나는 묘한 희열을 느꼈다. 드디어 교코의 통쾌한 복수가 시작되었다는 확신에 속으로 외쳤다. '얼른 도망쳐!'라고.
산중턱을 뚫어서 건설한
노쓰카 터널에 접어들었다.
이곳만 빠져나가면
해안선은 바로 코앞이다.
페이지 142
<폭싹 속았수다>의 금명이 전남친 '영범'의 어머니가 떠올랐다. 금명이가 떠나고, 영범이와 영범이의 어머니의 모습이 벌을 받는 것처럼 보였다. 그들이 그렇게 싸고 돌았던 금은보화라고 생각했던 게 사실은 알량한 자존심이었다는 걸.
잔잔한 바다에 달의 길이 그어졌다.
조수석 너머에 태평양이
느긋하게 누워 있었다.
엑셀을 세게 밟을 때마다
기억이 떨어져 나갔다.
패이지 143
그녀가 떠난 뒤, 그 집안은 어떤 망신살이 뻗칠까. 교코의 소중함을 모르고 막대해던 그 사람들은 어떤 벌을 받게 될까. 그 동안 도맡았던 살림은 시어머니가 하겠지. 가즈야가 진 더러운 빚은 누가 갚게 될까. 그 와중에도 시어머니는 또 아들 가즈야를 감싸겠지. 가즈야는 뭐, 어떨지 짐작이 갔다.
주위 사람들의 냉랭함에
혼자 울며불며 분해하는 다키를 상상하자
저절로 입가가 헤실헤실 풀어졌다.
페이지 138
그런 생각을 모조리 한 후에야 다음 장으로 넘어갈 수 있을만큼 여운이 짙었다. 그런 소설이 몇 개 더 남아있다니, 아직 한참 더 가야하는 비행기 시간은 잊고, 재미있는 소설을 읽을 생각에 신이 났다.
바다로 돌아가다
출처 입력
<줄거리>
1974년 3월 게이스케는 이발소를 연 지 10일 차 되는 신입 이발관이다. 10년 동안 자신을 가르쳐 준 스승의 말을 엄정하게 지키며, 이발사의 소신을 가지고 손님을 귀하게 여기며 이발하겠다는 신념을 가지고 운영하고 있다. 그러던 중 '기네코'라는 여성이 찾아왔다.
기네코는 목덜미의 제모를 부탁했다. 얼굴과 뒷목을 정기적으로 손질하는 것은 대부분 밤일을 하는 여성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자그마한 얼굴이 가슴께로 다가왔다.
입김이 끼칠 듯한 거리에 놀라
게이스케는 주춤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페이지 165
기네코의 밝고 쾌활한 성격은 이발에만 집중하려는 게이스케의 마음을 묘하게 파고 들었다. 상대를 당황스럽게 하는 발칙한 매력을 가진 기네코는 게이스케로 하여금 내심 기다리고 긴장하게 만들었다.
기네코의 목덜미는
새벽녘에 바다로 돌아가는
오리온자리의 별 세 개를 떠올리게 했다.
페이지 179
어느 날 기네코는 다시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가게를 나갔다. 게이스케는 혼란스러웠다. 오늘 밤에 오겠다는 건지, 아니면 다른 날 오겠다는 건지. 기약 없이 기다렸다. 가위 연습을 하며 기다리다가 문을 닫으려는 순간, 기네코가 문을 두드렸다.
이 둘의 서사를 다 이해하기 전에는 '순진한 남자를 꼬신 노련한 꽃뱀' 이라고 생각했다. 그건 그냥 내 수준을 나타내는 꼴이었다. 내 수준에는 그들의 사정과 상황을 이해할만 한 그릇이 없었던 것 같다.
그렇게 둘은 서로를 원하지만, 상처 많은 기네코가 가정을 이루고 살아가기엔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었다. 기네코가 경험한 세상은 따뜻함이 아닌, 체념이었다. 임신 중절 수술을 많이 했다고 부풀려 말해도,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또 임신 중절 수술을 하게 만드는 비정한 세상이었다.
늘 부끄러워하고, 숫기 없던 게이스케는 기네코에게 참을 수 없는 원망을 느낀다. 아이를 왜 지우냐고, 게이스케의 아이가 아니더라도 그냥 거짓말하고 자신과 함께 살면 되지 않았냐고. 우직한 이발관은 끝내 무너져내리며 눈물을 흘린다.
게이스케를 기네코는 어린 아이처럼 바라본다. 지금 황홀함을 느끼게 만드는 그의 순수함이 자신을 얼마나 다치게 만들지 아주 잘 아는 것처럼.
빙평선
<줄거리>
정월의 북적거림이 사라진 포구, 얼어 붙은 도로를 세이치로는 걷고 있다. 그가 도착한 곳은 포구 가장 안쪽 으슥한 에 있는 함석지이다. 그 집의 새어나오는 불빛을 보며 세이치로는 10년 전을 떠올린다.
세이치로는 어부의 아들이었다. 그 동네에 아이들은 대개 어부가 되거나, 관공서에서 일하는 선택 뿐이었다.세이치로는 매일 맞고 사는 어머니에 대한 답답함과 아버지에 대한 원망을 품고 있었다.
어느새 아버지를 향한
분노는 옅어지고
억눌렀다고 생각한 욕망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페이지 255
그날밤에 아버지를 밀치고 세이치로는 집을 나왔다. 어디로 가야할지 고민하던 세이치로는 홀린듯 도모에가 있는 함석집을 찾아갔다. 도모에는 할아버지를 봉양하기 위해 그 마을의 몸을 팔아먹고 살고 있었다. 도모에는 아무 말도 없는 세이치로에게 찾아온 이유를 묻지 않고, 그저 차를 내주었다.
도모에를 홀린 듯 쳐다보던 세이치로는 그만 속옷을 적셨다. 견디기 힘든 굴욕감을 느끼고, 고개를 떨구었다. 도모에는 어떠한 기교 없는 노련한 간호사처럼 세이치로의 수치감을 옅어지게 해 주었다.
도모에의 이야기가 어쩐지
거짓말처럼 들렸던 것이
실은 거짓말을 전혀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은,
열여덞 살의 세이치로는 아직 알지 못했다.
페이지 262
세이치로는 도교대 입학 후, 재무성에 들어갔다. 운이 맞아 10년 간 찾지 않은 고향 훗카이도 이와미자와의 세무서장으로 발령이 났다. 고향 친구들을 찾아 환영회가 열린 날, 그곳에서 알바를 하고 있는 도모에를 발견했다.
<감상평>
도모에를 만난 세이치로는 다시금 사랑의 감정을 느낀다. 그녀를 찾아가지만, 세무서장이 몸 파는 여자를 만난다고 수근덕거린다. 세이치로는 소문에 개의치 않고 관저에 도모에를 데리고 와 함께 지내기로 한다.
그렇게 둘은 사랑의 도피가 성공할 거라 생각했다. 모든 걸 포기할 준비가 많은 것을 가진 사람이 이미 결정을 내렸으니,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도모에는 금방 결정을 내릴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세상은 그 둘을 축복하지 않는 것 같았다. 세이치로의 아버지는 자신의 아들이 세무서장이라는 것을 앞세워 사람들에게 사기를 치고 다녔다
그 사실을 안 세이치로는 돈을 주어 마무리 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 날, 부모님 집에는 원인불명의 화재가 났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사체로 발견됐다.
세이치로는 도모에를 찾아갔다. 그는 도모에가 한 짓이라고 생각했다. 그녀에게 대체 왜 그랬냐고 물었다. 그 순간 나도 도모에가 그랬다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그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실은 이랬다.
이제 다 괜찮으니까
마음 놓고 일 잘하라고 하셨어.
흐느껴 울면서 변소 같은 여자와는
제발 헤어지라고 애원하시길래
내가 석유를 뿌리면서 어머니도 이제
안심하고 떠나시라고 말해줬어.
페이지 297
아버지의 사기 사건을 알게 된 도모에는 자신이 도울 일이 있을까 싶어 세이치로의 부모님을 찾아갔다. 도모에가 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어머니가 아버지를 죽인 뒤였고, 어머니는 넋이 나가 있었다.
거기서 멈췄다면 비극은 그런대로 비극이 되었을 것 같다. 어머니의 모진 말에 도모에는 집에 불을 지르고 나온 도모에는 자신의 씻을 수 없는 죄를 죽음으로 갚으려 하고 있었다.
도모에는 사건의 진상을 세이치로에게 털어 놓은 후, 자신의 죄를 속죄하듯 훗카이도의 바다로 뛰어 들었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얼음이 울고 있었다.
소리는 섬뜩하게 메아리쳐
몸에 지잉 울렸다.
페이지 298
세이치로는 분명 도모에를 용서할 수 있었을 것이다. 도모에도 세이치로의 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도모에는 자신의 과오를 씻을 수 없다는 마음에 자신의 생을 던졌다.
세이치로를 위한 일일까, 아니면 도모에 자신을 위한 일이었을까. 아직도 어려운 답이다. 그저 내게 남은 건 바다와 하늘의 경계가 희미한 신비로운 빙평선의 전경 뿐이다.
AI 활용 설정
사진 설명을 입력하세요.
소설은 엄혹한 추위와 척박한 북녘의 땅 '훗카이도'를 배경으로 전개된다. 황량한 대지만큼이나, 척박한 환경에서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그들의 삶. 처절한 생활 속에서도 그들은 희망을 품는 일을 놓지 않는다. 열심히 절망하고, 상처를 품는다.
빙평선이라는 소설에는 성적인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작가의 소감에는 그 이유를 그런 소재를 쓰면 사람들이 더 봐주지 않을까 했다는 말이 적혀있다.
다만, 그 묘사가 따분하거나, 그저 욕정에 지나지 않는 필력이었다면 이 작품에 실망했을 것이다. 우리가 지금껏 보아온 '성'은 미개한 느낌이 강했으니까.

이 소설을 읽으며, 우리가 가진 '성'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우리 생을 아름답게도, 또 굴욕적이게도 만드는 강력한 힘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또 어쩌면 그런 양면적인 면 때문에 강력함을 가질 수 있다는 생각도 든다.
그의 유려하고, 고급스러운 묘사와 표현에 감탄이 나온다. 어쩜 이렇게 물 흐르듯이, 그곳에 내가 있어도 이렇게 깊이 있게 공간을 체험하고, 감정을 느낄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단편이라는 점에서 다르지만, 삶의 고단함과 그럼에도 나아가야 하는 잡초 같은 마음이 나를 절절하게 울린다.
다른 소설 <호텔 로열>도 읽어볼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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